재난 심리학

재난 트라우마는 DNA를 바꿀 수 있을까?

daon-eju 2025. 7. 15. 14:12

재난을 겪은 사람들의 삶은 확실히 달라진다.
하지만 그 변화는 단지 심리적, 정서적인 차원에만 머무를까?
최근 과학자들은 강렬한 감정적 충격, 특히 재난과 같은 극단적 스트레스가 단순히 '기억'에 남는 것을 넘어, 신체 내부, 심지어 DNA 수준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있다.

이 글에서는 재난 트라우마가 인간의 유전자에 어떤 흔적을 남기고, 그 변화가 다음 세대로 ‘유전’될 가능성, 그리고 실제로 이런 현상이 실험적으로 관찰된 사례들을 통해 트라우마와 DNA 사이의 복잡한 연결고리를 탐색해본다.
과연 감정은 세포에 기록되는가?
재난은 ‘나’만이 아니라 ‘내 아이’의 삶에도 영향을 주는가?

 

재난 트라우마의 DNA

 

재난 트라우마가 몸속에 남을 수 있을까?

트라우마는 일반적으로 심리적인 개념으로 이해된다.
충격적인 사건 후 반복되는 기억, 공포, 무기력함, 분노, 불면, 우울… 이런 증상은 주로 감정이나 행동의 문제로 취급된다.

하지만 최근 연구들은 트라우마가 호르몬 시스템, 면역 체계, 뇌 구조, 유전자 발현 방식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보고하고 있다.
즉, 마음에 남은 상처가 신체의 기능, 더 나아가 세포 수준에도 흔적을 남길 수 있다는 것이다.

 

후성유전학(Epigenetics)이란 무엇인가?

DNA는 일반적으로 변하지 않는다고 배웠다.
하지만 후성유전학(Epigenetics)은 유전자의 ‘활성/비활성’을 결정짓는 메커니즘을 연구하는 분야다.

쉽게 말하면, DNA는 책이라면, 후성유전 정보는 책에 붙어 있는 포스트잇과 같다.
그 포스트잇이 어떤 부분은 “읽지 마”, 어떤 부분은 “여기부터 시작해”라고 지시를 내린다.

스트레스, 영양 상태, 환경, 감정적 충격 등이 이 ‘포스트잇’을 붙이거나 떼는 방식으로 유전자 발현을 조절하게 된다.
즉, DNA 염기서열은 그대로지만, 그 사용법이 달라지는 것이다.

 

트라우마가 후성유전적 변화를 일으킨다는 연구

연구 사례 1 : 홀로코스트 생존자 2세 연구

뉴욕 마운트사이나이 병원 정신과 연구팀(2015)은 나치 강제수용소 생존자의 자녀들을 대상으로 유전자 분석을 시행했다.
놀랍게도, 생존자 자녀들 역시 스트레스 관련 유전자(NRK1, FKBP5 등)에서 비정상적인 후성유전 마커가 발견되었다.
이들은 일반 대조군보다 불안과 우울 점수가 높았고, 스트레스에 과민 반응을 보였다.

ㆍ 요약 : 부모의 외상 경험이 자녀의 유전자 발현 방식에 영향을 준다.

 

연구 사례 2 : 9·11 테러 생존자 연구

2001년 뉴욕 9·11 테러 당시, 사고 현장을 직접 경험한 임산부들의 아이들을 추적 조사한 결과, 아이들도 코르티솔(스트레스 호르몬) 관련 유전자에서 비정상적인 후성유전 변형이 발견되었다.
심지어 출생 당시부터 스트레스 반응이 과민했다는 보고도 있었다. 

연구 사례 3 : 네덜란드 기근 연구

제2차 세계대전 중 네덜란드 기근(Dutch Hunger Winter)을 겪은 임산부의 자녀들은 세대가 지나도 여전히 대사 질환, 우울증, 불안장애에 취약한 경향이 나타났다.
이 역시 후성유전 변형이 원인일 수 있다는 분석이 제기되었다.

 

재난 경험이 자녀에게 어떤 영향을 줄 수 있을까?

트라우마가 후성유전적 방식으로 자녀에게 영향을 줄 수 있다면, 그 메커니즘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ㆍ 극심한 감정 충격호르몬/신경계 변화스트레스 반응 유전자 조절후성유전 마커 형성

      자녀에게 유전 or 임신 중 태아에게 전달

 

이는 유전자의 변화라기보다는, 유전자 스위치가 “ON/OFF” 되거나 민감도가 바뀌는 것이다.
그 결과, 아이는 실제로는 재난을 겪지 않았더라도 ‘불안한 부모’를 통해 감정적 과잉 경계 상태를 갖고 태어날 수 있다.

 

회복은 가능한가? 후성유전은 되돌릴 수 있는가?

가장 흥미로운 점은, 후성유전적 변화는 되돌릴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명상, 안정된 애착관계, 정신치료, 운동, 식이조절 등 일상 속 환경 변화와 심리적 회복이 유전자 발현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들이 속속 나오고 있다.

즉, 트라우마는 세포에 흔적을 남길 수 있지만, 그 흔적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재설정 가능한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심리적 유산 정리법

만약 재난 경험이 세대를 건너 영향을 줄 수 있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단순히 트라우마를 ‘잊는 것’이 아니라,
그 감정을 마주하고, 이름 붙이고, 표현하고, 연결하는 것이다.

그 방법은 다음과 같다:

  • 감정 기록 : "그때 나는 어떤 감정을 느꼈는가?"를 정리
  • 자녀와 대화 : 부모가 겪은 일을 아이에게 부드럽게 나눌 수 있도록 준비
  • 회복 루틴 만들기 : 운동, 명상, 루틴으로 뇌를 안정시키는 환경 조성
  • 전문가 도움 받기 : 심리상담이나 정신치료는 유전자 발현에도 긍정적 영향

 

재난은 세포 속에도 흔적을 남긴다

 

우리는 보통 트라우마를 마음에 남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과학은 그것이 몸, 세포, 유전자, 심지어 다음 세대까지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재난 트라우마는 단지 ‘기억’이 아니다.
그것은 신체화된 감정이며, 유전될 수 있는 심리적 흔적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 흔적은 인식하고, 이해하고, 치유함으로써 다시 바꿀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의 감정은 유전자를 건드릴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오늘 회복을 선택한다면, 그 회복 또한 다음 세대에게 건강한 유전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