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 심리학

심리 부채, 재난 직군이 무너지기 시작하는 지점

daon-eju 2025. 7. 5. 17:47

사람들은 재난이 닥쳤을 때 누구보다 빠르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며 안도한다. 구조대원이 현장에 도착하고, 소방관이 불길로 들어가고, 경찰이 사람을 대피시키는 모습을 볼 때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그들이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그러나 그들은 과연 자신도 지킬 수 있을까?
재난의 최전선에 있는 사람들은 매번 생사의 경계를 마주하면서도 감정을 표현할 틈조차 없이 다음 임무에 나선다. 그들이 남겨두는 감정은 어디로 사라질까? 이 질문은 결국 '심리 부채'라는 개념으로 이어진다. 이 글은 재난 직군이 어떻게 감정을 외면하게 되는지, 그것이 어떤 부채로 축적되는지를 하나의 이야기처럼 따라간다. 그리고 우리는 이 흐름을 통해 감정이 억압될 때 인간이 무너지는 지점을 마주하게 된다.

 

심리 부채, 재난 직군이 무너지기 시작하는 지점

 

감정을 빚지는 사람들

구조 현장은 늘 혼란스럽고 비정상적이다. 쓰러진 구조물, 울부짖는 사람들, 무너진 삶의 잔해가 뒤엉킨 그 속에서 구조대원은 본능적으로 움직인다. 그들의 임무는 분명하다. 한 사람이라도 더 구해야 한다는 것. 그런데 그 임무에 감정은 개입할 자리가 없다. 두려움이나 연민, 공포나 무력감 같은 감정은 판단을 흐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조자는 감정을 잠시 접어둔다.

하지만 ‘잠시’라는 말은 거짓말이다. 감정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 감정은 응급상황이 끝난 뒤에도 온전히 해소되지 못한 채 마음속에 쌓인다. 이때부터 구조자는 자신이 느낀 감정을 묻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렇게 억눌린 감정은 점차 ‘심리적 부채’로 변한다.

‘심리 부채’란 자신이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감정이 쌓이고 쌓여 마치 빚처럼 심리 내부에 축적되는 현상을 말한다. 우리는 보통 빚이라는 단어를 돈과 관련해 사용하지만, 감정에도 갚지 못한 빚이 존재한다.

재난 직군의 사람들은 그 빚을 외면한 채 살아간다. 당장 구조해야 할 사람이 있고, 눈앞의 위기를 수습해야 하기 때문에 자신에게 집중할 여유가 없다. 그렇게 감정은 또 미뤄지고, 또 쌓인다.

 

그들이 감정을 말하지 않는 이유

감정을 느끼는 것과 그것을 표현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많은 구조대원은 자신이 고통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누군가에게 말하지 않는다. 때로는 그것이 약해 보일까봐 두렵고, 때로는 그 감정을 꺼냈다가 더 무너질까 두려워서다.

조직 문화 역시 이들의 입을 닫게 만든다. 구조나 소방, 경찰과 같은 직종에서는 감정을 숨기는 것이 미덕처럼 여겨진다. 특히 선배들은 후배에게 감정을 제어하라고 가르치며,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아야 ‘프로’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 말은 사실상 ‘느끼지 마라’, ‘표현하지 마라’는 말과 같다. 그렇게 수년을 보내고 나면 사람은 점차 감정에 무뎌지게 된다. 누군가의 죽음을 봐도 무덤덤해지고, 위험한 상황에서도 긴장감이 줄어든다. 이 무감각은 훈련의 결과라기보다는 정서가 고장난 상태에 가깝다. 감정이 고장 나면 사람은 서서히 자신을 잃기 시작한다.

 

갚지 못한 감정이 사람을 무너뜨릴 때

심리 부채는 어느 날 갑자기 무너지는 방식으로 드러난다. 어떤 구조대원은 한 현장에서 이상하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날은 아무 일도 없었어요. 그런데 그냥...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어요.” 이 말은 흔한 번아웃 증상의 시작이다.

무기력은 우연히 찾아오지 않는다. 오랜 시간 억눌렸던 감정들이 정서 에너지를 소모시키면서 결국 정신을 탈진 상태로 몰아간 결과다. 이 상태에서는 어떤 구조든 대응 능력이 급격히 떨어지고, 자존감 역시 무너진다.

더 심각한 경우, 몇 년이 지나 갑자기 PTSD 증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과거에는 아무렇지 않게 넘겼던 기억이 꿈속에서 다시 등장하고, 평범한 소리에도 몸이 움찔하게 되는 상태. 이런 지연된 외상 반응은 심리 부채가 어느 임계점을 넘었을 때 폭발하는 방식이다.

또 하나 자주 나타나는 양상은 죄책감이다. 구조하지 못한 사람에 대한 죄책감, 내가 그때 더 빨랐더라면 하는 후회, 그것이 쌓여 결국 자기 비난으로 이어진다. 이 자기 비난은 구조자 스스로를 파괴한다. “내가 못해서 죽은 거다”라는 생각은 실제 사실과는 무관하게 사람을 병들게 한다.

 

구조자가 자기 자신을 구조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심리 부채를 줄일 수 있을까? 첫 번째는 말할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감정은 말로 꺼내야 해소된다. 말하지 않으면 감정은 마음속에서 썩는다.

구조대원이나 소방관이 일과 후 자신이 느낀 감정을 조용히 말할 수 있는 시간, 공간,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 일기처럼 간단한 글을 쓰거나, 정기적인 대화를 나누는 것도 큰 도움이 된다. 그것이 곧 ‘이자’를 조금씩 갚는 행위다.

두 번째는 조직 차원의 개입이다. 감정은 개인의 힘으로만 다룰 수 없다. 구조 조직 내에 전문 상담사나 심리 프로그램을 도입해야 한다. 특히 신입이 감정에 휘둘리지 않도록 돕는 동시에, 감정을 적절히 표현하는 훈련도 병행해야 한다. 감정을 다루는 것은 약함이 아니라 전문성이다.

그리고 세 번째, ‘심리 부채’라는 개념 자체가 공론화되어야 한다. 이것은 단순히 감정 관리의 문제가 아니다. 사람의 생존과 직결된 문제다. 감정은 기술처럼 배워야 할 대상이고, 구조자의 정서 회복은 곧 국민 안전과 연결된다.

 

재난의 현장에서 가장 먼저 움직이는 사람들. 우리는 그들이 늘 강하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들도 인간이다. 아무리 훈련을 받았어도, 아무리 임무가 중요해도 감정은 무시할 수 없다. 감정을 무시하는 순간, 그 감정은 빚이 되어 되돌아온다.

그 빚이 너무 많아졌을 때, 사람은 무너진다. 그것은 단순한 번아웃이 아니며, 잠깐의 피로도 아니다. 감정이라는 이름의 무게를 홀로 견딘 끝에 사람이 붕괴하는 지점. 바로 그것이 심리 부채가 폭발하는 순간이다.

진짜 구조자는 감정을 억누르는 사람이 아니다. 감정을 다루고,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사람이다. 자기 자신을 구조할 수 있어야 타인을 구조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사실을 더 이상 외면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