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 심리학

재난 시 '비선형 시간감각 상실'에 대한 심리적 연구

daon-eju 2025. 7. 6. 13:09

시간은 흐르지 않았다. 아니, 너무 빨랐다.

 

재난은 물리적 사건이지만, 그것은 곧 사람의 인지와 감정, 사고에 깊은 균열을 남긴다. 특히 재난을 직접 겪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비슷한 말을 한다. “그 순간은 시간이 멈춘 것 같았어요.” 혹은 “모든 게 순식간이었어요.” 실제로 같은 상황을 겪은 이들이 전혀 다른 시간 체감을 하는 현상이 있다. 심지어 동일한 사람도 사고 당시와 이후의 기억을 회상할 때 시간의 흐름이 일관되지 않음을 경험한다.

이는 단순한 기억 오류가 아니다. ‘비선형 시간감각 상실(Nonlinear Temporal Disruption)’은 위기 상황에서 인간이 겪는 심리적 시간 왜곡 현상을 설명하는 개념이다. 우리는 늘 시간은 일정하게 흐른다고 믿는다. 그러나 재난 앞에서 시간은 사람의 마음속에서 전혀 다른 방식으로 흘러간다. 이 글은 그 시간의 흐름이 무너지는 순간을 추적하고, 그 심리적 의미를 천천히 들여다본다.

 

재난 시 '비선형 시간감각 상실'에 대한 심리적 연구

 

시간은 왜곡될 수 있다

일상 속에서 사람들은 시간을 분 단위, 초 단위로 느낀다. 하지만 재난 상황은 이 익숙한 리듬을 깨뜨린다. 어떤 이에게는 몇 초가 몇 분처럼 느껴지고, 어떤 이에게는 몇 분이 마치 찰나처럼 지나간다.

이런 현상은 단순한 착각이 아니라, 위협 인지 시 발생하는 인지 부하와 뇌의 생존 반응 때문이다. 사람이 생명의 위협을 받는 순간, 뇌는 감각을 일시적으로 재구성한다. 불필요한 정보는 차단하고, 핵심적인 자극에 집중하도록 구성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시간에 대한 감각 역시 조절된다. 시간은 정지하거나 늘어나거나 축소된다. 인간이 느끼는 시간은 실제 물리적 시간이 아니라, 뇌가 만들어내는 심리적 구성물이기 때문이다.

 

재난 상황에서 나타나는 시간 왜곡의 양상

1. 시간 정지 경험

다수의 생존자들은 재난 순간을 회상할 때 “모든 것이 멈춘 것 같았다”고 말한다. 특히 순간적인 사고, 예를 들어 차량 충돌, 건물 붕괴, 폭발 등 에서는 이 정지 현상이 자주 보고된다.

뇌는 갑작스러운 충격에 마주할 때, 모든 주의를 생존에 필요한 자극으로 몰아주기 위해 ‘시간을 일시적으로 느리게’ 처리한다. 감각의 속도를 줄이는 대신 해상도를 높이는 것이다. 그래서 단 몇 초 동안 수많은 생각과 장면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이는 실제 시간이 느려진 것이 아니라, 인지 처리량이 과도하게 증가했기 때문에 발생하는 착각이다.

2. 시간 압축 혹은 ‘순간의 소멸’

반대로 어떤 이들은 전체 재난 상황이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구조되고 있었어요.” 이 경우는 뇌가 극도의 스트레스 속에서 ‘기억 자체’를 차단하는 방식으로 반응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때 뇌는 생존을 위한 처리 외의 감각은 모두 생략한다. 기억으로 남지 않는 시간은 곧 체감되지 않는 시간이다. 이는 사람에게 시간이 압축되거나 아예 삭제된 것 같은 경험으로 남는다.

3. 왜곡된 순서 기억

재난을 겪은 뒤 사람들은 종종 사건의 순서를 혼동하거나, 일어난 일의 위치와 시간을 뒤섞는다. 시간의 흐름이 선형적으로 저장되지 않기 때문이다. 감정의 강도, 충격의 크기, 생존 본능의 개입 등이 기억을 재배열하며, 실제 흐름과는 다른 ‘내적 시간 순서’를 구성하게 된다.

 

심리학적으로 본 ‘비선형 시간감각 상실’

이러한 시간 왜곡은 심리학에서 트라우마 반응의 핵심 증상 중 하나로 간주된다. 특히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환자 중 상당수는 시간 감각의 왜곡을 겪으며, 트리거 상황에서 과거의 사건이 현재처럼 재생되기도 한다.

심리학자들은 이 현상을 뇌의 편도체, 해마, 전전두엽 간의 상호작용 문제로 설명한다. 위협 상황에서 편도체가 과도하게 활성화되면, 해마(기억 저장소)는 시간 정보를 정확히 정렬하지 못한다. 그 결과, 경험은 마치 조각난 필름처럼 저장되고, 시간이 뒤죽박죽 섞인 기억으로 남게 된다.

이것이 바로 ‘비선형 시간감각 상실’의 심리적 핵심이다. 시간은 존재했지만, 그 사람의 마음속에서는 직선이 아닌 곡선처럼, 혹은 끊긴 점선처럼 남는다.

 

재난 이후의 삶에서 시간은 어떻게 회복되는가?

재난이 지나간 뒤에도 사람은 여전히 시간의 흔들림 속에서 살아간다. 일상이 회복되었는데도 시계의 바늘은 여전히 부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경우가 많다. 특히 재난 직후 일정 시간 동안은 시간감각이 정상화되지 않고, 무기력하거나 과민한 반응이 반복된다.

재난을 겪은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단지 공간적 안전이 아니라 시간적 안전감이다. 시간은 마음이 안전하다고 느낄 때 다시 직선으로 흐른다.

이를 위해 전문가들은 감각 중심의 심리 회복 기법, 즉 마음챙김, 점진적 노출, 신체 기반 치료법(Somatic Therapy) 등을 활용한다. 이 방법들은 사람의 감각을 현재로 붙잡아두고, 시간 흐름의 감각을 회복시키는 데 효과적이다.

 

일상의 시간과 재난 속 시간의 차이

우리는 평소 ‘정상적인 시간’에 익숙해 있다. 하루는 24시간이고, 1시간은 60분이며, 모든 일은 순서대로 일어난다. 하지만 재난은 이 일상성을 완전히 파괴한다. 시간은 더 이상 예측 가능한 흐름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왜곡된 장면들의 연속이 된다.

이 단절감은 재난 피해자에게 깊은 고립감을 남긴다. “나만 시간이 멈춘 것 같다”는 느낌, “모두가 앞으로 나아가는데 나만 그날에 머물러 있다”는 감각. 이것은 단순한 기분이 아니라, 시간에 대한 내적 구조가 손상되었다는 신호다.

 

재난은 시간을 망가뜨린다

재난은 사람에게서 많은 것을 빼앗아간다. 공간을 파괴하고, 생명을 앗아가며, 일상을 무너뜨린다. 하지만 우리가 간과하기 쉬운 또 하나의 피해는 시간의 붕괴다.

사람은 시간을 따라 살아간다. 기억도, 감정도, 일상도 시간 위에 존재한다. 그런데 그 시간이 무너질 때, 사람은 ‘살아남았지만 살아 있는 것 같지 않은 상태’에 놓인다.

‘비선형 시간감각 상실’은 그런 상태를 설명해주는 하나의 심리적 렌즈다. 우리는 이 개념을 통해 재난 생존자의 내면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고, 그들의 회복을 돕는 방법도 더 정교하게 설계할 수 있다.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할 때, 사람은 비로소 살아 있는 삶으로 돌아올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