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재난 심리학

유아기들의 재난 기억은 어떻게 형성되는가?

누구도 재난을 쉽게 잊지 못합니다. 큰 지진, 화재, 코로나19 같은 감염병, 갑작스러운 이별이나 이사처럼 일상의 기반이 무너지는 사건들은, 어린이에게도 심리적 충격과 기억의 흔적을 남깁니다. 특히 유아기, 즉 3세에서 6세 사이의 아이들은 언어와 인지 능력이 충분히 발달하지 않은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재난을 겪고 난 뒤 다양한 심리 반응을 보입니다.

하지만 이 시기의 아이들은 종종 “아직 어려서 몰라요”, “기억도 못 할 거예요”라는 이유로 보호자나 사회의 관심에서 소외되기 쉽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정말 유아들은 재난 상황을 기억하지 못할까요?

이번 글에서는 유아기의 아이들이 재난을 어떻게 인식하고 기억하며, 그 경험이 어떤 심리적 흔적으로 남는지, 그리고 부모와 사회는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유아기들의 재난 기억

 

유아기의 기억은 왜 특별한가?

 

유아기는 기억 체계가 형성되는 초기 단계입니다. 생후 첫 2~3년은 ‘비언어적 기억(non-verbal memory)’이 중심이고, 이후 점차 언어와 감정을 연결하여 ‘에피소드 기억(episodic memory)’을 쌓아갑니다.

이 시기의 기억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집니다:

  • 감정 중심의 기억: 상황의 세세한 내용보다는 느꼈던 감정이 먼저 남습니다. 예: “그때 무서웠어”, “엄마가 울었어”
  • 부분적이고 왜곡된 기억: 유아는 경험 전체를 선형적으로 기억하기보다, 인상 깊은 순간만 단편적으로 저장합니다.
  • 보호자의 반응을 함께 기억: 어린아이는 자신의 감정보다 부모의 감정을 기준으로 상황을 판단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즉, 유아는 모든 것을 기억하지는 않지만, 공포, 긴장, 혼란, 안도 같은 감정 상태를 중심으로 재난 상황을 자신의 방식대로 마음에 저장하는 것입니다.

 

유아기 재난을 경험하면 어떤 심리 반응을 보일까?

 

재난을 직접 겪거나 간접적으로 접한 유아는 다양한 반응을 보입니다. 이는 기억의 형성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1. 퇴행 행동
    말 잘하던 아이가 말을 더듬거나, 혼자 자던 아이가 부모 옆에서 자려고 하는 등 이전 단계로 돌아가는 듯한 행동이 나타납니다. 이는 유아가 심리적 안정감을 찾기 위한 자기방어 반응입니다.
  2. 불안 및 분리불안 증폭
    유아는 “다시는 엄마를 못 볼까 봐”라는 불안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는 안전기반의 상실에 따른 심리 반응으로, 재난 상황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헤어짐 자체가 공포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3. 놀이를 통한 재연
    인형을 가지고 소방관 놀이를 한다거나, 블록으로 무너지는 건물을 만드는 등, 유아는 재난 경험을 놀이 속에서 반복 재현합니다. 이는 기억을 정리하고 감정을 해소하려는 자연스러운 과정입니다.
  4. 수면 장애 및 야경증
    재난 이후 악몽, 쉽게 깨는 수면 패턴, 잠자리 거부 등 수면 문제가 늘어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는 무의식 속 불안이 수면 중 드러나는 형태입니다.

이처럼 유아기의 재난 경험은 기억으로 남지 않는 것이 아니라, 언어가 아닌 몸과 감정, 행동으로 표현되며, 뇌의 기억 회로에 자리 잡습니다.

 

재난 기억은 어떻게 형성되고 지속될까?

기억은 단순히 “있는 그대로 저장되는” 것이 아니라, 당시의 감정 강도, 주변 반응, 반복된 노출에 따라 형성됩니다. 유아기의 재난 기억 또한 다음의 세 가지 요소에 영향을 많이 받습니다:

1. 감정의 강도

공포나 불안을 강하게 느낄수록, 해당 상황은 더욱 오래 기억됩니다. 유아는 논리보다 감정으로 상황을 판단하기 때문에, 당시의 심리 상태가 기억 형성의 중심이 됩니다.

2. 보호자의 태도

부모나 교사가 당황하거나 지나치게 불안한 모습을 보이면, 유아는 “이건 정말 무서운 일이야”라고 판단하게 됩니다. 반대로 침착하고 신뢰감 있는 어른의 태도는 불안 조절의 기준점이 됩니다.

3. 사후 반복 노출

재난 관련 영상이나 뉴스, 이야기를 자주 접하면, 기억은 강화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적절한 설명 없이 반복 노출되면 오히려 왜곡된 공포로 남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기억들은 이후 재난 유사 상황에서 과도한 반응으로 나타나거나, 일상 속 불안감으로 연결되기도 합니다. 즉, 유아기 재난 경험은 장기적인 심리 건강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요한 기억이라는 뜻입니다.

 

유아기 재난 기억을 건강하게 관리하려면?

그렇다면 부모나 보호자는 아이가 재난 상황을 건강하게 기억하고, 트라우마 없이 성장하도록 도울 수 있을까요? 다음과 같은 접근이 효과적입니다.

1. 사건을 축소하지 말고, 아이의 감정을 인정하기

“그거 아무 일 아니야”, “무서운 거 아니었잖아”라고 말하기보다는,
“그땐 정말 놀랐지?”, “무섭고 속상했겠다”라고 공감하는 표현을 먼저 해주세요. 감정을 억누르게 하기보다는 말로 표현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 기억을 건강하게 정리하는 첫걸음입니다.

2. 나이에 맞는 언어로 설명해주기

재난의 원인이나 안전수칙을 유아가 이해할 수 있는 간단한 언어와 시각 자료로 설명해주세요. 예: “불이 나면 연기가 나서 숨쉬기 힘들어.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나가는 거야.”

3. 놀이와 그림을 통한 감정 해소 유도

아이에게 그날 있었던 일을 그림으로 표현하게 하거나, 인형극이나 역할극을 통해 감정을 정리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놀이 속에서는 말보다 더 많은 이야기가 드러납니다.

4. 안정감 주는 일상 회복

유아는 ‘일상의 리듬’을 통해 안전을 느낍니다. 훈련 이후 가능한 한 평소와 같은 시간에 식사, 수면, 놀이를 유지해주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5. 필요시 전문가 상담 연결

아이가 지나치게 불안해하거나, 행동 변화가 오래 지속될 경우에는 소아 심리상담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것도 좋은 선택입니다. 초기 개입은 이후 정서 발달에 긍정적인 영향을 줍니다.

 

잊지 못할 기억을, 회복의 시작점으로

“아이들은 금방 잊는다”는 말은 반만 맞는 이야기입니다. 유아는 어른처럼 기억하지 않지만, 몸과 감정으로 재난을 기억합니다. 때로는 말하지 못한 기억이 오래 남고, 그것이 성장하면서 불안이나 두려움으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유아기는 회복탄력성(resilience)이 매우 높은 시기이기도 합니다. 보호자의 따뜻한 반응, 적절한 설명, 반복 학습과 놀이를 통한 감정 해소는 유아가 재난을 단지 무서운 경험으로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그래도 나는 안전했어”, “엄마가 날 지켜줬어”, “그 이후로 우리는 더 가까워졌어”라는 긍정적인 기억으로 재구성할 수 있게 만듭니다.

재난은 피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 기억을 어떻게 남기느냐는 어른의 몫입니다. 유아기의 기억은 작고 단순해 보여도, 그 안에는 아이가 세상을 어떻게 이해하고,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는지가 담겨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단순히 ‘잊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아이 스스로 기억을 해석하고 이겨낼 수 있도록 옆에서 도와주는 것입니다. 아이는 생각보다 훨씬 많은 것을 느끼고, 표현하며, 이겨낼 수 있습니다. 단지 그 과정을 함께 걸어줄 누군가가 필요할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