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재난이 발생하면 가장 먼저 소방관이나 구조대원, 의료진을 떠올린다. 그러나 그 현장에서 조용히, 그리고 깊이 사람들의 삶을 붙잡아주는 또 다른 존재가 있다. 바로 심리상담사다.
물리적인 생존과 구조가 급한 것은 분명하지만, 재난이라는 극단적인 상황에서 인간의 마음은 구조만으로 치유되지 않는다. 심리적 충격, 상실, 공포, 죄책감, 그리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의 혼란은 시간이 지나도 자연스럽게 회복되지 않는다.
심리상담사는 이 복잡하고 깊은 마음의 붕괴 앞에서,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함께하며 돕는 존재다. 이 글에서는 재난 현장에서 실제 활동하는 심리상담사들의 역할과 실제 사례를 통해, 우리가 흔히 놓치기 쉬운 '심리적 회복'이라는 또 다른 구조작업의 중요성을 다룬다.
재난 현장에서의 심리적 충격, 누구도 예외일 수 없다
재난은 예고 없이 찾아온다. 무너진 건물, 침수된 마을, 불길에 휩싸인 가정집, 그리고 갑작스럽게 이별을 맞이한 사람들. 이런 상황 속에서 인간은 본능적으로 살아남기 위한 행동을 하게 되지만, 동시에 감정의 붕괴라는 또 다른 재난을 겪게 된다.
많은 사람들은 재난 직후의 충격에 의해 자신이 지금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도 모른 채 멍해지고, 어떤 이는 극심한 공황이나 통곡 속에 빠지기도 한다. 그리고 그 감정은 시간이 지나면서 불면, 무기력, 트라우마, 죄책감, 우울감, 분노 등 다양한 모습으로 변형된다.
문제는 이 심리적 문제들이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고, 스스로도 인식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재난 피해자들은 종종 이런 감정을 “내가 약해서 그렇다”, “지금은 참아야 한다”며 억누르곤 한다.
그러나 이런 억압은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키고, 회복이 늦어지거나 평생을 따라다니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로 발전할 수 있다.
심리상담사는 ‘구조자’이자 ‘동행자’다
심리상담사는 재난 직후부터 중장기 회복 단계까지, 정서적 구조자 역할을 수행한다. 이들은 단순히 위로의 말을 건네는 사람이 아니라, 전문적인 훈련을 통해 사람들의 감정 상태를 파악하고, 정서적 안정과 회복을 유도하는 전문가다.
특히 재난 현장에서는 다음과 같은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1. 심리적 응급처치(Psychological First Aid)
응급처치라는 말은 보통 신체적 부상에 사용되지만, 심리적 충격에도 응급처치가 필요하다.
심리상담사는 피해자와 최초로 마주치는 순간, 감정의 과잉 반응을 진정시키고, 안정을 찾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 이 과정에서는 강요 없이, 피해자가 안전하다고 느끼는 공간에서, 피해자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반응하는 것이 핵심이다.
2. 말보다 ‘경청’에 집중
재난 상황에서는 "힘내세요"나 "괜찮을 거예요" 같은 위로가 오히려 피해자에게 부담이 될 수 있다.
심리상담사는 이러한 상황에서 ‘무조건적인 경청’을 통해 피해자의 감정을 받아들이고, 스스로 감정을 표현하도록 유도한다. 감정을 밖으로 꺼내는 행위만으로도 사람의 뇌는 트라우마를 해석하고 치유하는 과정을 시작할 수 있다.
3. 상실감과 죄책감의 완화
특히 가족이나 친구를 잃은 피해자들은 "내가 그때 더 빨리 움직였더라면", "내가 왜 살아남았는가" 하는 죄책감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다. 이런 감정은 심리상담사의 섬세한 접근 없이는 절대 풀어지지 않는다. 상담사는 이런 생각이 생존자의 공통 반응임을 설명하고, 그 감정이 정당하다는 인식을 심어줌으로써 감정의 균형을 되찾도록 돕는다.
4. 아이들과 노인을 위한 맞춤 상담
어린이와 고령자는 특히 재난에 취약한 심리 집단이다. 아이는 언어적 표현이 부족해 감정을 몸으로 표현하거나 꿈속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내는 경우가 많고, 노인은 극도의 무기력에 빠지기 쉽다.
심리상담사는 연령에 따라 상담 방식과 접근법을 달리 적용하며, 게임, 그림, 터치, 이야기 등 다양한 기법을 활용해 감정을 끌어내고 정서적 안정을 유도한다.
실제 사례 : 2019년 강원 산불 현장에서의 심리상담사 활동
2019년 강원도 고성 지역에서 대형 산불이 발생했을 때, 많은 이들이 한밤중에 집을 잃고 대피소에서 밤을 보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주민이 정신적 충격을 경험했으며, 몇몇은 대피소 안에서 불안 발작을 겪기도 했다.
이때 심리상담사들이 지역 대피소에 투입되어 심리적 응급지원 활동을 펼쳤다. 한 상담사는 대피소에 있던 60대 여성과의 상담 중, 그녀가 반복적으로 “내가 진짜 집이 없어졌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는 말을 중얼거리는 것을 듣고, 곁에 앉아 손을 잡고 30분 동안 아무 말 없이 함께 있었다. 그 시간이 지나자 여성은 울음을 터뜨렸고, 그 뒤로는 상담을 통해 조금씩 현실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처럼 심리상담사는 말이 아니라 ‘존재’로 치유하는 사람이다.
재난현장에서의 그 한 사람의 침착한 태도, 공감의 눈빛, 그리고 조용한 경청이, 피해자에게는 단단한 줄이 되고, 다시 삶을 붙잡게 하는 힘이 된다.
중장기 회복 과정에서의 상담사 역할
재난 직후의 충격이 어느 정도 가라앉은 뒤에도 많은 피해자들은 여전히 트라우마에 시달린다. 이 시기의 상담사는 단기적 감정 안정이 아니라 장기적인 회복과 일상 복귀를 지원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방식이 활용된다:
- 정서일지 작성 지도 : 감정 변화 과정을 스스로 기록하게 하여 자가 인식 능력을 높인다.
- 트라우마 재처리 기법(EMDR 등) : 외상 기억에 대한 감각 자극을 병행하며 충격을 해소하는 전문적 기법을 적용한다.
- 집단 상담 진행 :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들과 함께 감정을 나누며 ‘나만 그런 게 아니다’는 인식을 형성한다.
- 재적응 프로그램 : 일상생활로 복귀할 수 있도록 감정관리, 대인관계 회복, 직장 복귀 코칭 등을 지원한다.
심리상담사도 치유가 필요하다
흥미로운 사실은, 심리상담사 본인도 때로는 심리적 소진(burnout)을 경험한다는 점이다.
재난 현장은 감정적으로 매우 강렬한 공간이며, 끊임없는 감정의 흐름을 받아주는 상담사들도 결국 인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상담사에게도 슈퍼비전(전문가 간 피드백), 회복 프로그램, 자기 돌봄 훈련이 필요하다. 그래야 지속적으로 건강한 상태에서 도움을 줄 수 있다.
무너진 것은 건물만이 아니다
재난은 눈에 보이는 것만 파괴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마음, 일상, 관계, 그리고 자존감까지 무너뜨린다. 그 잔해를 치우고 삶을 다시 세우는 일은 심리상담사 같은 조용한 전문가들에 의해 가능해진다.
그들은 구조 현장에서 큰 소리를 내지 않는다. 그들은 응급실에서 생명을 살리지는 않지만, 사람의 내면을 살려낸다.
그들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단순히 ‘살아남는 것’을 넘어 ‘회복하고 다시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찾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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