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노인이 겪는 재난 상황은 단순한 대피 그 이상이다. 혼란스러운 기억 속에서 현실의 공포를 마주해야 하는 그들의 이야기를 다뤘다.
기억이 사라지는 세상에서, 재난은 더욱 잔혹해진다
우리는 재난 상황에서의 대응을 당연하게 여긴다. 지진이 발생하면 대피하고, 화재가 나면 소화기를 찾는다. 익숙한 공간에서 벗어나야 한다면,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고 안전한 곳으로 이동한다. 하지만 그 모든 ‘당연한 대응’이 기억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주 잊는다.
치매를 앓는 노인에게는 이 ‘기억’이 이미 모래처럼 흩어지고 있다. 자신이 있는 곳이 어디인지, 옆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조차 불확실한 상황에서 갑작스러운 재난이 닥친다면 어떨까? 어디로 가야 할지,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전혀 인식하지 못한 채 공포의 한가운데에 던져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 혼란은, 주변 사람들이 아무리 친절하게 안내해도 쉽게 해결되지 않는다.
오늘 이 글에서는 기억 상실 상태에 있는 치매노인이 재난 상황을 마주했을 때 겪는 현실적인 공포와 심리적 고립을 이야기하려 한다. 그리고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그들을 더 안전하게, 더 따뜻하게 보호할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해본다.
치매노인에게 ‘재난’은 단순한 상황이 아닌, 정체성 붕괴의 순간
치매는 단순한 기억 감퇴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자아 정체성과 현실 인식 능력의 붕괴를 동반하는 질병이다.
즉, 치매를 앓는 노인에게 세상은 이미 일정 부분 '낯선 공간'으로 변해 있다. 익숙했던 집조차 낯설게 느껴지고, 가족의 얼굴도 때때로 인지되지 않는다. 이러한 상황에서 재난은 ‘혼란의 극한값’이다. 사이렌 소리, 진동, 연기, 물의 범람 등 외부 자극이 갑작스럽게 몰려오면, 치매노인은 현실과 망상의 경계가 완전히 무너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한 노인은 화재 발생 시 대피하라는 소리를 듣고도, 그것이 자신을 해치려는 공격으로 인식해 도망가지 않았다. 또 다른 경우, 홍수로 대피소로 이동해야 할 때 “여긴 우리 집이 아니야”라며 울면서 돌아가려 했다. 이처럼 상황 판단력의 결여는 생명에 직결되는 문제로 이어진다. 문제는, 이 모든 반응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 아니라, 충분히 예상 가능한 인지적 특성이라는 점이다.
그렇기에 치매노인에게는 일반적인 재난 매뉴얼이 아닌, 전용 매뉴얼이 필요하다.
실제 사례로 보는 혼란과 공포의 교차점
사례 1: 폭우 속 실종된 치매노인의 이야기
2022년 여름, 기록적인 폭우로 한 지역에서 치매노인이 실종된 사건이 있었다.
그는 가족과 함께 살고 있었지만, 폭우 경보가 울리는 순간 갑자기 집 밖으로 나가 사라졌다. 나중에 확인된 바로는, 그 경보 소리를 ‘전쟁이 시작됐다’는 과거 기억으로 오해한 것이었다. 그는 자신을 피난민이라 믿고, 물속으로 향한 것이다.
기억 왜곡과 상황 오판이 재난 상황에서 얼마나 위험한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사례 2: 지진 대피 중 혼란에 빠진 보호소 내 치매노인
한 지진 발생 이후 대피소에 모인 사람들 사이에서 치매노인은 보호소 환경을 감옥이나 병원으로 인식했다.
그래서 반복적으로 탈출을 시도했고, 이로 인해 사고 위험이 높아졌다. 도움을 주려던 자원봉사자를 향해 위협적인 행동을 하기도 했다. 이는 치매노인의 두려움이 ‘현실 기반’이 아닌, 기억 왜곡과 감정적 과거 회상에서 비롯됨을 보여주는 사례다.
우리가 반드시 준비해야 할 대응 전략
① 시각 중심의 정보 전달은 무력해진다
재난 방송이나 대피 지침은 대부분 시각 자료 중심이다. 문자 안내, 간판, 시각 표지 등은 치매노인에게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들은 글자를 해석하거나, 상징을 기억하거나, 지도에서 위치를 파악하는 기능이 손상되어 있기 때문이다.
▶ 해결 방안:
- 청각 중심의 간결하고 반복적인 음성 안내 제공
- 친숙한 단어와 말투 사용 (“할머니, 여긴 안전한 곳이에요. 따뜻한 이불도 있어요.” 등)
- 인지 기능 수준에 따라 1:1 대면 중심 안내 필요
② 낯선 공간이 더 큰 공포로 작용한다
대피소나 구호 시설은 대부분 치매노인에게 낯선 환경이다. 여기서 “여기가 어디지?”라는 불안은 빠르게 공포로 이어진다.
낯선 사람들, 낯선 침구, 낯선 냄새는 현실 왜곡을 가속화시킨다.
▶ 해결 방안:
- 대피소 내 ‘인지 장애 전용 공간’ 마련
- 가족이 곁에 있도록 동반 대피 유도
- 익숙한 물건(담요, 사진, 인형 등)을 함께 제공해 심리적 안정감 확보
③ 대응 인력의 치매 교육이 부족하다
많은 자원봉사자나 구조 인력이 치매에 대한 이해 없이 현장에 투입된다. 그래서 치매노인의 행동을 ‘말 안 듣는 사람’, ‘위협적인 사람’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 해결 방안:
- 재난 대응 매뉴얼에 치매 특화 지침 추가
- 지역사회 복지사, 요양보호사와 연계한 전담반 운영
- ‘치매 패스포트’ 도입: 긴급 연락처, 병력, 인지 기능 상태가 담긴 식별 태그 제공
기억은 사라져도 존엄은 남아야 한다
치매를 앓는다는 것은 단순히 ‘잊는 것’이 아니라, 존엄이 흔들리는 순간들을 반복해서 경험하는 것이다.
재난 속에서 그런 상황이 벌어진다면, 그 존엄은 더욱 쉽게 무너진다. 사람들은 흔히 “기억하지 못하니 괜찮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감정은 기억보다 오래 남는다. 누군가의 거친 말, 낯선 환경에서 느낀 공포, 혼란스러운 시선은 마음에 상처를 남긴다.
그리고 그것은 곧 심리적 고립과 정서적 학대로 이어진다. 우리가 진정으로 보호해야 할 것은 생명뿐만 아니라 존엄이다.
재난 상황에서 치매노인이 ‘존중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 것, 그것이 진정한 회복의 시작이다.
"그들도 누군가의 전부였고, 여전히 소중한 사람이다"
재난은 모든 사람에게 위협이지만, 특히 치매노인에게는 삶 전체를 뒤흔드는 폭력이 될 수 있다.
그들은 단지 길을 잃은 노인이 아니다. 누군가의 부모, 누군가의 배우자, 누군가의 인생을 지탱했던 존재였다.
그리고 지금도 누군가에게는 여전히 가장 소중한 사람이다. 기억을 잃어도, 그들이 겪는 감정은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그들이 혼란을 덜 느끼도록 돕고, 공포를 함께 나누며, 존엄을 끝까지 지켜주는 일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묻지 말아야 한다. "왜 기억 못 하세요?"가 아니라 "지금 괜찮으세요?"라고 말해야 한다.
그 한마디가 누군가에겐 생명을, 또 다른 누군가에겐 인간으로서의 마지막 남은 자존감을 지켜주는 일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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