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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 심리학

이주노동자의 재난경험 : 언어 장벽과 심리적 소외

재난 상황 속에서 이주노동자가 겪는 언어 장벽과 심리적 고립은 생존 자체에 위협이 된다. 현장의 목소리와 대안을 조명해 본다.

 

"그들은 마지막에 구조된다" – 말할 수 없는 공포의 현실 

재난은 모두에게 평등하지 않다. 눈에 보이는 피해는 같을 수 있어도, 재난을 대하는 정보 접근성, 대응 속도, 구조 우선순위는 서로 다르다. 그 중에서도 특히 재난 상황에서 가장 뒤처지는 이들이 있다.
바로 이주노동자다. 이주노동자들은 한국 사회의 기반을 지탱하는 중요한 인력이지만, 재난 상황에서 그들의 안전은 항상 뒷순위로 밀려난다. 이유는 단순하다.
언어 장벽, 정보 단절, 제도 외부자라는 정체성, 그리고 심리적 소외 때문이다. 그들은 재난이 닥쳤을 때 구조 요청을 할 언어도, 대피할 장소도, 연락할 보호자도 없다.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재난이 발생한 줄도 모르고 작업을 계속하는 사례도 있었다.
이는 단지 ‘소통’의 문제가 아니라, 기본적인 생존권과 존엄성의 문제다. 오늘 이 글에서는 이주노동자가 재난 속에서 겪는 실질적 어려움, 그리고 우리가 놓치고 있는 구조적 문제에 대해 다뤄보고자 한다.

 

이주노동자의 재난경험

 

재난 상황에서 ‘언어’는 생존 수단이다

재난이 발생하면 사람들은 정보에 의존한다.
어디로 대피해야 하는지, 어떤 장비를 써야 하는지, 지금 무슨 상황인지 알 수 없다면 생존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한국어에 익숙하지 않은 이주노동자들은 이 기본적인 정보조차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태풍이 예보된 날 모든 국민에게는 ‘기상 특보’가 문자로 전송된다. 하지만 이주노동자들은 한국어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거나, 한글 문자 자체를 읽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그 결과, 대피 명령을 이해하지 못해 공장에서 작업을 계속하거나, 위험 지역에 머무르다가 고립되는 일이 실제로 발생하고 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러한 정보 격차가 단순히 ‘해프닝’으로 치부된다는 점이다. “그 사람들은 잘 몰라서 그래.”
이런 말은 실상 제도와 언어 시스템이 그들을 배제했다는 사실을 외면하는 무책임한 해석이다.

실제 국내 한 산업단지에서는 폭우로 인한 침수 위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주노동자 숙소에는 어떤 경고 메시지도 전달되지 않았다. 관리자는 “모두 한글밖에 없어서 전달이 어렵다”고 했고, 그 말이 마치 면책 사유처럼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생명과 직결되는 정보를 언어가 다르다는 이유로 제공하지 않는 것은, 사실상 구조적 차별이다.

 

통역이 없는 현장, 존재가 투명해지는 순간들

재난이 닥쳤을 때, 많은 공공기관과 지자체는 한국어로 브리핑을 진행하고 매뉴얼을 한국어로 배포한다.
이주노동자가 많이 거주하는 지역조차도 외국어 통역 인력이나 다국어 매뉴얼을 갖춘 경우는 매우 드물다. 이로 인해 이주노동자들은 재난 대응 현장에서 마치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취급된다. 구호물품을 받지 못하고, 대피소에서도 머물 곳이 없으며, 의료 서비스마저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경우가 발생한다.

예를 들어, 2023년 강원도 산불 당시, 한 미얀마 출신 이주노동자는 “연기가 가득했지만, 아무도 뭐라고 말해주지 않았다. 다들 떠났고, 우리는 나중에야 상황을 알았다”고 증언했다. 심지어 대피소에 도착해도 그들이 말할 수 있는 언어가 없고, 설명해주는 사람도 없다면 그 공간은 안전지대가 아닌, 또 하나의 낯선 감옥이 된다.
언어는 단지 ‘정보를 전달하는 도구’가 아니라, 그들에게는 존재를 인정받는 유일한 수단이다. 말할 수 없고, 이해받지 못할 때, 그들은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된다.

 

재난 후에도 남는 건 트라우마와 불신뿐

재난은 물리적인 피해뿐 아니라, 심리적인 후유증을 남긴다. 그 중 가장 깊은 상처는 “나는 그 순간 아무도 아닌 존재였구나”라는 감정이다. 많은 이주노동자들은 재난이 끝난 뒤에도 불안, 공황, 악몽, 사회적 고립을 겪는다. 그러나 그들은 이를 표현할 언어가 없고, 그 감정을 설명할 대상도 없다. 이로 인해 치유의 기회조차 가로막힌다.

더 큰 문제는 재난 이후 피해 보상, 심리 상담, 법적 지원 등 모든 시스템이 ‘한국어’ 기반으로만 운영된다는 점이다. 그들은 종종 보상 대상에서 제외되거나, 절차를 이해하지 못해 신청하지 못한다. 결국 “이주노동자는 언제나 구조 후순위”라는 인식이 생기게 되고, 이는 장기적인 불신과 심리적 위축으로 이어진다. 사람들은 종종 이주노동자들에게 “왜 아직 한국어를 못해요?”라고 묻는다.
하지만 정작 한국 사회는 그들에게 한국어를 배우고, 적응할 수 있는 구조나 시간조차 제공하지 않는다.

 

제도적 보완이 필요한 현실 – 다국어 재난 매뉴얼의 필요성

지금까지 우리가 재난 상황을 대비하는 방식은 대부분 ‘내국인 중심’의 시각에서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주노동자 인구가 꾸준히 증가하고, 산업 구조 전반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는 지금, 그들을 위한 제도적 보완은 더 이상 선택이 아닌 필수다.

필요 조치

  1. 다국어 재난 안내 시스템 구축
    • 문자 메시지, 경보 알림, 방송 안내를 최소 5개 국어 이상으로 병행 제공
    • 주요 외국인 밀집 지역에는 전담 통역 인력 배치
  2. 이주노동자 대상 사전 재난 교육 의무화
    • 고용주와 지자체가 정기적으로 ‘시뮬레이션 훈련’ 진행
    • 시각자료 및 영상 중심으로 구성된 교육 콘텐츠 필요
  3. 대피소 내 다문화 지원 공간 마련
    • 문화적 차이를 고려한 공간 분리, 다국어 안내, 맞춤형 식사 제공
    • 통역 자원봉사단 운영으로 심리적 안정 도모
  4. 재난 후 외국인 피해자 지원센터 활성화
    • 피해 접수, 보상 신청, 심리상담까지 원스톱으로 처리할 수 있는 구조 구축

 

국경 없는 재난, 차별 없는 구조

재난은 국적과 피부색, 언어를 가리지 않는다. 하지만 구조와 보호는 그렇지 않았다. 우리는 오랫동안 ‘우리’만을 위한 재난 시스템을 만들어왔다. 그 결과, 함께 살아가는 ‘그들’은 늘 뒷순위에 있었다. 이주노동자들은 단순한 외국인이 아니다.
그들은 우리가 먹는 음식을 만들고, 건물을 세우고, 도로를 닦는 한국 사회의 또 다른 구성원이다. 그들의 안전은 곧 우리의 안전이다. 언어는 장벽이 아니라, 다리를 놓을 수 있는 기회다. 이제 우리는 재난 속에서도 이주노동자가 단 한 명도 소외되지 않도록 제도와 인식을 바꿔야 한다.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도움’이 아니라 ‘존중’이다. 재난이 닥쳤을 때,
“그들도 한국 사회의 일원으로 먼저 구조될 수 있다”는 신뢰와 시스템이 함께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