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큰 사고를 당한 현장에 우리가 서 있다고 상상해보자.
누군가는 피를 흘리고 있고, 누군가는 말없이 울고 있으며, 누군가는 멍한 표정으로 한 자리에 앉아 있다.
당연히 우리는 구급차를 부르고, 가능한 한 안전한 곳으로 사람들을 이동시킬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질문을 해보자.
그 현장에서 심장이 멀쩡해도, 마음이 부서진 사람에게 우리는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
다친 곳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걸까?
그렇지 않다. 바로 이런 순간에 필요한 것이 심리적 응급처치, 영어로는 Psychological First Aid(PFA)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상처, 그럼에도 분명히 존재하는 고통
사고나 재난을 경험한 사람은, 몸보다도 마음에 더 큰 충격을 받는다.
무서움, 혼란, 죄책감, 분노, 그리고 앞으로 벌어질 일을 감당할 수 없다는 불안감까지.
이런 감정은 아주 빠르게 몰려오고, 때로는 압도적인 무력감으로 사람을 무너뜨리기도 한다.
그런데 이때 누군가가 다가와 조용히 물어본다.
“괜찮으세요? 제가 옆에 있어도 될까요?” 이 단순한 말 한마디는 때로 어떤 약보다 강력한 위로가 된다.
심리적 응급처치(PFA)란 바로 이런 것이다. 상처 입은 마음에 응급 붕대를 감아주는 것.
전문적인 치료가 아니더라도, 지금 이 순간을 견딜 수 있도록 지지해주는 인간적인 접근이다.
우리는 왜 말 대신 침묵하는가?
많은 사람들이 위기 상황에서 누군가를 마주하면 조심스럽게 물러서곤 한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내가 괜히 건드렸다가 더 힘들게 할까 봐…”
하지만 PFA는 그 무엇보다 '함께 있어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치료하려 하지 않아도 된다.
정답을 말하려 하지 않아도 된다.
그저, 지금 이 순간 당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느끼게 해주는 것. 그것이면 충분하다.
심리적 응급처치는 특별한 사람만 하는 것이 아니다
PFA는 전문 상담사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어른이, 학생이, 직장 동료가, 이웃이, 때로는 낯선 사람이라도, 기초적인 훈련만 받으면 누구나 실천할 수 있는 심리 지원 방법이다.
물론 어떤 말을 해도 상처를 다 없앨 수는 없다. 하지만 잘못된 말 한마디가 고통을 더 크게 만들 수도 있다.
그래서 PFA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못지않게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가’를 강조한다.
“잊어버려요.”
“이제 울지 마요.”
“그래도 살아서 다행이에요.”
이런 말은 도리어 상대방의 감정을 억누르고 고립시키는 작용을 한다.
반면,
“그럴 수 있어요.”
“그 상황에서는 누구라도 힘들었을 거예요.”
“제가 옆에 있어 드릴게요.”
이처럼 간단하지만 따뜻한 말은 사람의 심장을 다시 뛰게 만든다.
PFA가 실제로 도움이 될 수 있을까?
많은 연구들은, 재난이나 사고 이후 즉각적인 심리적 지지를 받은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PTSD)을 겪을 확률이 낮고,
- 정서적으로 회복되는 속도가 빠르며,
- 사회로의 복귀가 더 원활하다고 말한다.
또한 PFA는 1회성 지원이 아니라, 회복의 시작점을 열어주는 역할을 한다.
즉, 지금 이 사람의 심리를 존중하고, 이후 필요한 전문가 도움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응급처치자’가 되어야 할 이유
현대 사회는 끊임없는 위기와 재난의 시대다.
뉴스에서는 언제나 누군가의 고통이 이어지고 있고, 우리는 종종 그 옆에 서 있는 입장이 되기도 한다.
그럴 때, 말없이 외면하지 않고 한 걸음 다가설 수 있다면 그건 단지 좋은 사람이 아니라, 안전한 사회의 구성원이 되는 길이다.
PFA는 말한다.
누구나 할 수 있고, 누구나 해야 한다고. 마음의 상처는 응급처치의 대상이 될 수 있으며, 그 첫 번째 손길은 우리의 일상 속에서
시작되어야 한다고.
심리적 응급처치(PFA)는 화려한 상담 기술이 아니다. 그건 오히려 가장 기본적이고 인간적인 행동에 대한 회복이다.
함께 있어주고, 들어주고, 기다려주고, 연결해주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짜 치유의 시작이다.
우리는 구급차를 부르지 않아도, 붕대를 들지 않아도 누군가의 마음을 지지하는 작은 응급처치자가 될 수 있다.
그러니 기억하자. 오늘도 내 주변에 마음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누군가가 있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건넬 수 있는 손이 있다.
말이 있다. 눈빛이 있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이미 누군가에게 큰 도움이 되고 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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