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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 심리학

가난한 이들이 겪는 이중 재난

재난은 평등하지 않다. 가장 약한 이들을 더 깊은 절망으로 끌고 간다

재난은 모두에게 다가올 수 있다.
하지만 그 재난이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어떤 영향을 남기는지는 모두에게 같지 않다. 한국 사회에서 “재난은 평등하지 않다”는 말은 더 이상 비유가 아니다. 그 말은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재난이 한 번이 아닌 두 번 찾아온다는 현실을 고스란히 말해주고 있다.

첫 번째 재난은 물리적인 피해다.
침수, 붕괴, 화재, 감염병처럼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재난이다. 하지만 두 번째 재난은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구조받지 못하는 경험, 잊혀지는 감정, 지원에서 배제되는 현실로 다가온다. 그리고 이 두 번째 재난이야말로, 사람을 가장 깊은 심리적 절망으로 몰아넣는다. 오늘 이 글에서는 가난한 이들이 겪는 이중 재난의 구조를 분석하고,
그 절망이 어떻게 사회 시스템 속에서 반복적으로 재생산되는지를 다뤄본다. 그리고 우리가 놓치고 있는 ‘구조의 결핍’이 무엇인지, 그 공백을 어떻게 메워야 하는지도 함께 고민해본다.

 

가난한 이들이 겪는 이중 재난

 

첫 번째 재난 : 생존 그 자체를 위협하는 물리적 위험

재난은 누구에게나 고통을 준다.
하지만 가난한 이들에게는 같은 재난도 훨씬 더 가혹한 결과를 안긴다.

예를 들어,

  • 침수로 인한 피해가 발생했을 때, 상류층은 아파트에 거주해 상대적으로 안전한 반면,
  • 저소득층은 반지하, 고시원, 쪽방, 주택가 저지대에 거주하기 때문에 직접적인 타격을 입는다.

2022년 서울 강남 일대의 폭우 피해 당시, 고급 주상복합 건물은 침수로부터 신속하게 복구되었지만,
반지하에 살던 한 가족은 탈출조차 하지 못한 채 물에 잠겨 세상을 떠났다.

이처럼 가난한 이들은 안전한 거주 공간이 없고, 대피를 위한 차량이나 금전적 여유도 없으며, 보험 가입조차 되어 있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 결과, 똑같은 자연재해가 ‘삶의 기반 전체를 무너뜨리는 사건’이 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아직 시작일 뿐이다. 진짜 재난은 그 이후, 즉 ‘아무도 그들을 구조하지 않았을 때’부터 시작된다.

 

두 번째 재난 : 구조의 공백, ‘잊힘’이 만들어낸 절망

사람은 재난을 겪은 후, 반드시 치유와 복구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가장 먼저 구조되고, 빠르게 복구되는 사람들은 대부분 사회적 자원이 많은 사람들이다.
그 반대편에 선 가난한 이들은 재난 이후에도 여전히 비닐을 덮은 집, 끊긴 전기, 젖은 침구 속에서 버텨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많은 저소득층 피해자들은 정부 지원금 신청 절차조차 제대로 접근하지 못한다.
인터넷을 통한 신청, 복잡한 서류, 신분증 확인, 소득 증빙 등은 정보 격차와 디지털 소외로 인해 장벽처럼 느껴진다.
게다가 언어 장벽이 있는 외국인 노동자, 노숙인, 노인 독거 가구는 아예 구조 대상에서 빠지기도 한다.

그들이 느끼는 감정은 단순한 외로움이 아니다. “나는 구조받을 자격조차 없는 존재인가?” 이런 질문은 존엄을 흔드는 심리적 절망으로 이어진다.

피해 회복이 더딜수록, 주변의 관심이 사라질수록, 그들은 점점 더 자신이 사회에서 **‘지워지는 존재’**라고 느끼게 된다.
이 절망은 단순히 우울이나 상처가 아닌, 삶을 포기하고 싶은 무기력으로 발전할 수 있다.

 

반복되는 패턴 : 왜 가난한 이들만 더 크게 무너지는가

재난이 발생할 때마다 피해를 입는 계층은 놀랍도록 비슷하다.
저소득층, 비정규직, 1인가구, 장애인, 이주노동자.
이들은 재난에 대응할 물리적·경제적 여력이 없고, 구조 시스템에서 우선순위에 놓이지 않기 때문에 반복해서 피해를 입는다.

문제는 이 피해가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 번의 재난은 이들의 경제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고,
다음 재난에 더 취약한 상태로 내몬다. 이러한 구조는 ‘재난의 악순환 구조’다.

게다가 언론 보도는 주로 중산층 피해, 사업장 복구, 인프라 마비에 집중되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조용히 사라진다.

이것이 바로 ‘이중 재난’의 핵심이다. 재난 그 자체보다도 더 고통스러운 것은, “아무도 나를 신경 쓰지 않았다”는 경험이다.

 

가난한 이들의 감정 : 공포보다 더 깊은 감정은 무기력

재난은 보통 ‘두려움’으로 표현된다.
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이 겪는 재난의 감정은 두려움을 넘어서 있다.
그것은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감정”, 즉 무기력이다.

재난이 오기 전에도 힘들었고, 재난이 왔을 때는 더 힘들었고, 재난이 지나간 뒤에도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면 그들에게 재난은 사건이 아니라 일상이 된다. 이 무기력은 희망을 막는다. "다시 시작하자"는 말조차 공허하게 들린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수차례 ‘재난 뒤에 혼자 남겨진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감정은 정신 건강에도 치명적인 영향을 미친다. 우울증, 자살 충동, 대인기피, 자존감 붕괴 등 사회 전체의 회복력에도 악영향을 끼친다.

 

구조란 무엇인가: 단순한 구호를 넘어선 ‘존재의 확인’ 

재난에서 구조란, 단순히 사람을 물리적으로 구하는 일이 아니다.
진짜 구조는 그 사람이 ‘존재로서 존중받고 있다’는 감정을 전달하는 일이다.

도움의 손길은 단지 생명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당신은 우리가 지켜야 할 소중한 존재입니다"라는 메시지를 함께 전달한다.

그렇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에게 구조가 더 절실하다.
그들은 이미 사회로부터 수없이 밀려났고, 재난은 그 경계를 더욱 선명하게 만든다.

만약 재난의 한복판에서 “누군가 나를 기억하고 있다”는 감정을 느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다시 일어설 힘을 만들 수 있다.
구조란 곧 존엄의 회복이고, 희망의 시작이다.

 

재난은 인간의 힘으로 피할 수 없지만, 외면은 피할 수 있다

기후 위기와 사회적 불평등이 겹쳐지는 지금, 앞으로의 재난은 더 자주, 더 극심하게 발생할 것이다.
하지만 이 재난이 항상 같은 사람들만을 희생시키고, 그들이 반복적으로 외면당한다면 우리는 더 이상 ‘사회’라 부를 수 없다.

가난한 이들이 겪는 이중 재난은 구조적인 문제이며,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지원 제도는 더 촘촘해져야 하고, 긴급 상황의 매뉴얼은 ‘사회적 약자’를 기준으로 다시 짜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재난이 닥쳤을 때 가장 먼저 기억하고 구조할 사람이 누구인지 우리 각자가 스스로에게 묻는 일이다.

재난은 인간의 힘으로 완전히 막을 수 없다. 그러나 구조의 외면, 기억의 결핍은 반드시 막을 수 있다.

그 작은 차이가 누군가에겐 삶과 죽음, 절망과 희망의 경계를 가르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