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은 모든 이들에게 충격이지만, 그중에서도 아이들에게 남기는 상처는 더 깊고 오래 지속된다.
어른들과 달리 아이들은 감정을 명확하게 말로 표현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의 불안, 공포, 상실감은 놀이와 행동 속에 스며든 채 표현된다. 놀이라는 활동은 단순한 유희가 아닌, 아이들이 내면의 심리를 외부로 드러내고, 자기 치유를 시도하는 심리적 통로다.
이 글에서는 재난 이후 아이들이 보이는 놀이 패턴을 통해 심리적 상처의 징후와 회복의 단서를 파악하는 방법,
그리고 성인(부모, 교사, 상담사)이 어떻게 개입하고 도울 수 있는지를 다룬다.
아이들은 상처를 ‘말’이 아닌 ‘놀이’로 표현한다
재난을 경험한 후, 아이는 종종 “무서웠다”, “슬펐다” 같은 감정을 입 밖에 내지 않는다.
그 대신 그들은 인형을 던지거나, 반복적으로 구조 놀이를 하거나, 자신이 죽는 역할을 자처하거나, 동생을 괴롭히거나 하는 방식으로 자신도 모르게 내면의 감정을 바깥으로 ‘투사’한다.
왜 그럴까?
아이의 두뇌는 아직 언어화 능력이 충분히 발달하지 않았고, 감정을 직접 표현하는 훈련도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놀이가 아이에게는 감정 해소의 통로이자, 트라우마를 재현하고 다시 조종해보는 심리적 도구가 된다.
재난 이후 이에 나타나는 심리적 상처의 징후
🔹 반복되는 구조 놀이
아이들이 소방관, 구조대원, 앰뷸런스 역할을 계속 연기하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당시의 무기력함을 극복하려는 시도다.
자신이 ‘살릴 수 있는 사람’이라는 가상의 역할을 통해 당시의 불안을 심리적으로 조종하려고 하는 것이다.
🔹 파괴적인 역할 놀이
건물을 무너뜨리는 블록 놀이, 인형을 때리거나 죽이는 설정의 놀이가 반복된다면 이는 재난 당시 목격한 장면을 놀이로 재연하며 외상 기억을 해소하려는 시도일 수 있다.
심한 경우 놀이에서 자주 “죽어”, “불탔어”, “없어졌어” 같은 표현이 등장하기도 한다.
🔹 자기 희생적 역할 선택
놀이터에서 친구들과 노는 상황에서도 항상 자신이 희생자나 피해자 역할을 자처할 경우, 이는 무의식 중의 자기비난이나 생존자 죄책감일 수 있다.
🔹 감정 없는 반복 놀이
표정도 없고, 언어도 거의 없는 상태로 혼자 동일한 놀이를 장시간 반복하는 경우는 감정 마비 상태 또는 우울 반응의 가능성이 있다.
🔹 나이에 맞지 않는 성숙한 놀이
아이가 너무 ‘어른처럼’ 행동하고 동생을 챙기며 현실적인 대화를 하려고 할 경우, 이는 재난 이후 책임감을 과도하게 느끼며 성장 압박을 받는 상태일 수 있다.
“나는 울면 안 돼”, “내가 도와줘야 돼”라는 생각이 아이 안에 뿌리내릴 수 있다.
놀이 속 회복의 징후 : 아이가 다시 살아난다
놀이는 아이에게 치료이기도 하다.
놀이라는 과정을 통해 아이는 두려운 장면을 다시 구성하고, 감정에 이름을 붙이며, 통제력을 회복한다.
다음과 같은 놀이 변화는 회복의 징후일 수 있다.
✅ 구조와 보호의 역할을 즐긴다
예전에는 파괴적 역할을 하던 아이가 이제는 구조대원이나 엄마 역할을 하며 인형을 다정히 돌보는 모습을 보인다면,
이는 심리적 안정감이 회복되고 있다는 신호다.
✅ 놀이의 결말이 긍정적으로 바뀐다
“건물이 무너졌지만 다시 지었어!”,
“사람들이 도와줘서 다시 살았어”라는 결말로 바뀌는 것은 회복탄력성의 회복을 의미한다.
✅ 또래와 함께 협력적 놀이를 한다
재난 이후 고립되던 아이가 다시 친구들과 협력하는 놀이나 상호작용이 필요한 게임을 하게 되면
관계 회복과 정서적 유연성의 회복을 보여준다.
✅ 감정을 표현하는 언어가 늘어난다
놀이 중 “무서웠어”, “슬펐어”, “다행이야” 같은 감정 단어가 나오기 시작하면, 이는 아이가 감정을 내면화만 하지 않고 외부로 건강하게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는 증거다.
어른이 해야 할 일 : 놀이를 분석하지 말고, ‘함께 있어주기’
부모나 교사, 보호자는 아이의 놀이를 관찰하며 “왜 저런 놀이를 하지?”, “정신이 이상해진 건 아닐까?”라는 불안감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아이의 놀이를 지나치게 분석하거나 억제하려 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어른은 다음과 같이 도와야 한다:
- 아이의 놀이를 그대로 인정하고 존중한다.
- 폭력적이거나 충격적인 내용이더라도 놀이라는 맥락에서 이해한다.
- 놀이 중 아이가 감정을 표현할 때,
“그랬구나”, “그건 정말 무서웠겠다”라고 공감해주는 말을 해준다. - 아이와 함께 역할극에 참여해 보호자 역할을 자연스럽게 섞어준다.
예: 아이가 소방관이라면, 어른은 구조된 인형 역할을 하며 “도와줘서 고마워”라고 반응.
무엇보다 중요한 건 놀이를 통해 감정을 반복해 표현하고 재구성할 수 있도록, 안전한 심리적 공간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그게 바로 아이의 회복을 가능하게 한다.
놀이라는 언어로 말한 아이의 마음
✅ 사례 ①
강원 산불 이후 대피소에 있던 6세 아이는 계속해서 나무 블록을 세운 후 무너뜨리는 놀이를 반복했다.
그리고 인형을 “불탔어”라고 말하며 침묵했다.
하지만 심리상담사가 함께하며 “무서웠겠구나”라고 감정을 함께 표현하자, 아이는 눈물을 흘리며 “다시는 안 태웠으면 좋겠어”라고 말했다.
👉 이 순간, 아이는 비로소 내면에 있던 불안을 언어화하며 회복의 첫걸음을 디뎠다.
놀이를 보면 마음이 보인다
재난은 아이들에게 단순히 ‘사건’이 아니라, 세상이 무너졌다는 경험이다.
그리고 그 경험은 말보다 먼저 놀이를 통해 표현된다.
놀이라는 안전한 세계 안에서 아이들은 무너진 세계를 다시 만들고, 사라진 사람을 살리고, 무기력했던 자신을 구해낸다.
어른의 역할은 그 세계를 비판하거나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지켜봐주고, 기다려주고, 응답해주는 것이다.
놀이를 통해 마음은 말 없이도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속에는 상처의 흔적뿐 아니라, 회복의 씨앗도 함께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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