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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 심리학

재난 이후 예술 활동이 회복에 미치는 심리 효과

말로 표현되지 않는 고통, 예술은 마음의 통로가 된다

재난은 육체적 피해만 남기지 않는다.
그 이후에 찾아오는 심리적 충격, 정서적 단절, 무력감과 불안감은 삶 전체를 뒤흔든다.
하지만 이 고통은 종종 말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때로는 말보다 깊은 언어가 필요하다.
바로 예술(art)이다. 그림을 그리는 아이, 글을 쓰는 청년, 피아노 앞에 앉는 할머니. 그들은 모두 하나의 공통된 본능을 따른다.
고통을 바깥으로 꺼내고, 스스로를 다시 이어붙이려는 심리적 움직임. 예술은 이처럼 말보다 더 빠르게 사람의 마음에 닿는다.

이 글에서는 재난 이후 그림, 글쓰기, 음악과 같은 예술 행위가 트라우마 회복에 어떤 심리적 효과를 주는지를 구체적으로 다뤄보겠다. 단순한 감정 표현을 넘어, 자아 회복, 사회적 연결, 정서 안정의 도구로서 예술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설명한다.  

 

재난 이후 예술 활동이 회복에 미치는 심리 효과

 

 

트라우마는 뇌에 남는다, 감정은 몸을 통해 흘러야 한다

트라우마(trauma)는 단지 기억에 남는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몸과 뇌, 감정과 반응 패턴에 각인되는 충격이다.
재난을 경험한 사람들은 종종 이유 없이 가슴이 답답하거나, 사소한 자극에도 갑자기 눈물이 나고,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공포를 느낀다. 이는 뇌의 편도체(감정 처리), 해마(기억 저장), 전두엽(이성 판단)의 연결이 일시적으로 끊어지기 때문이다.
특히 말로 표현되는 영역(전두엽)은 작동이 약해지고, 감정과 반사적인 반응이 우선되기 때문에 "말을 잃는 상태"가 발생한다.

이때 필요한 것은 이성적인 설명이 아니라, 감정을 흘려보낼 수 있는 통로다.
예술 활동은 이 역할을 한다. 특히 비언어적 표현(그림, 음악)은 감정의 에너지를 말이 아닌 방식으로 배출하게 해준다.
이것이 바로 예술치료의 핵심이다.

 

그림 : 머릿속 혼란을 ‘형태’로 꺼내는 감정의 도화지

그림은 의식보다 빠르게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수단이다.
재난 이후 심리상담에 참여하는 사람들 중, “무슨 감정인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종이를 내밀고 자유롭게 그리게 하면, 깜짝 놀랄 만큼 감정의 구조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예를 들어, 반복되는 선과 형태(불안, 강박), 어두운 색상과 공간감(우울, 상실), 왜곡된 얼굴이나 인물(정체성 혼란, 외상 반응),

이러한 시각 표현은 내면에서 무의식적으로 억눌려 있던 감정을 표면으로 끌어올리는 기능을 한다.

또한, 그리는 행위 자체가 자기통제감(sense of control)을 회복시키는 데 도움을 준다.
무언가를 ‘내 손으로 그린다’는 경험은 재난으로 무너진 세상 속에서 다시 내가 주도권을 쥐고 있다는 감각을 회복시킨다.

 

글쓰기 : 단어를 통해 혼란을 정리하고, 상처를 언어화하다

글쓰기는 가장 직접적인 ‘마음의 정리 도구’다.
재난 후 일기를 쓰거나, 편지를 쓰거나, 기억을 기록하는 활동은 감정이 흐르고 해석되며 통합되는 과정이다.

심리학자 제임스 페니베이커(James Pennebaker)는 "감정에 대해 글을 쓴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면역력과 심리 회복 속도가 높다"고 밝혔다.
이는 단순한 경험이 아니라, 자신의 감정을 언어화하면서 정서적 거리두기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재난 이후 감정은 모호하고 흐릿하다.
그때 글쓰기는 사건을 구조화하고, 자신의 입장을 명확히 하고, 당시의 감정을 구체적으로 인식하게 해준다.

특히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는 방식'은 심리적 연결감을 회복하고, 잃어버린 사람이나 공간과의 이별 과정을 돕는다.

 

노래와 음악 : 감정을 울리는 ‘리듬의 위로’

음악은 감정과 뇌파에 가장 빠르게 영향을 미치는 자극이다.
슬픈 음악은 눈물을 유도하고, 밝은 멜로디는 위로를 준다. 하지만 음악의 진짜 힘은 감정을 억누르지 않고 흐르게 해주는 안전한 공간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재난을 겪은 후, 사람들은 종종 감정을 터뜨릴 곳이 없어 무감각해지거나 냉소적으로 변한다. 이때 음악은 감정을 마비시키지 않고 자연스럽게 흘려보내는 역할을 한다.

또한 노래 부르기, 악기 연주 등 능동적인 음악 활동은 신체 에너지 분출, 자기 표현, 집단 활동을 통한 연결감을 유도하여 우울, 불안, 고립감 해소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음악을 통한 회복은 특히 아이들, 청소년, 말로 감정을 설명하기 어려운 사람들에게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다.

 

예술은 연결이다 : 공동체 속에서 치유는 배가된다

예술 활동은 개인의 정서를 표현하는 도구일 뿐만 아니라, 공동체 속에서 상처받은 사람들을 연결하는 매개체가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마을 벽화를 그리며 함께 색을 칠하는 활동, 추모시 쓰기 프로젝트, 재난 생존자 합창단, 연극 제작 등 이런 예술 활동은 단지, '창작'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는 경험을 만드는 집단 치유의 과정이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공감적 반영(empathic mirroring)이라 부른다.

다른 사람의 창작을 보고, 듣고, 나누며 내 감정도 안전하게 드러낼 수 있는 공간이 형성되는 것이다.

 

예술은 회복이다, 그리고 살아있다는 증거다

재난은 삶을 일시적으로 멈추게 만든다.
하지만 예술은 다시 움직이게 한다.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고, 노래를 부르는 행위는 마음이 아직 살아있고, 치유의 방향을 향하고 있다는 신호다. 예술은 그 어떤 언어보다 인간의 깊은 감정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다. 그리고 그 감정은 반드시 나눠져야 한다.
나누어질 때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고통이 의미가 될수 있음을 믿게 되고, 다시 삶을 이어갈 용기를 얻는다.

그러므로 재난 이후,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예술가’가 아니라 “무언가를 표현할 수 있는 인간”으로 다시 서는 일이다.

그 시작이 스케치북 위 낙서든, 지하철에서 흥얼거린 한 소절이든, 잠들기 전 써 내려간 한 줄의 문장이든 그것은 곧 회복이다.
예술은 고통 속에서도 우리가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가장 인간적인 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