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 심리학

가상재난 시뮬레이션과 감정의 실제 반응

daon-eju 2025. 6. 28. 16:34

현실이 아니어도 사람은 진짜처럼 반응한다

최근 재난 대응 훈련 현장에서는 가상현실(VR) 기술을 활용한 시뮬레이션이 활발히 도입되고 있다. 무너지는 건물, 번지는 화재, 요동치는 지반. 화면 속 세계는 분명 가상이지만, 체험자의 땀과 심박수, 불안한 눈빛은 현실과 다를 바 없다. 이러한 가상재난 시뮬레이션은 단순한 교육 수단을 넘어, 이제 인간의 감정과 인지 반응을 시험하는 새로운 심리학 실험 공간으로 주목받고 있다.

 

가상재난 시뮬레이션과 감정의 실제 반응

 

가상인데 왜 진짜처럼 무서운가?

 

인간의 뇌는 가상과 현실을 엄격히 구분하지 않는다. 특히 시각, 청각, 촉각을 동시에 자극하는 VR 환경은 뇌에 "이건 현실이다"라는 착각을 유발할 수 있다. 심리학적으로는 이를 감각 몰입(sensory immersion)이라고 한다. 연구에 따르면 가상재난 환경에 몰입한 사람들은 실제 재난 상황에서 나타나는 심박수 증가, 손바닥 발한, 불안감 고조, 공간지각 혼란 등의 반응을 유사하게 보인다.

예를 들어, VR을 통해 체험하는 고층 건물 화재 대피 훈련에서는 다수의 참가자가 현실과 동일한 공포 반응을 보고하였다. 어떤 이는 눈을 감거나, 바닥에 주저앉기도 했고, 끝까지 대피하지 못하고 시뮬레이션 중단을 요청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는 가상재난이 단지 기술적인 장치가 아니라, 심리적으로 실재하는 자극임을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다.

감정 반응은 훈련 효과에도 영향을 준다

가상재난 시뮬레이션의 핵심 목적은 교육과 훈련이다. 그러나 심리학적으로 보았을 때, 단순히 상황을 ‘보는 것’과 ‘느끼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정서적 몰입(emotional engagement)이 높은 경우, 학습 효과는 더욱 강력해진다. 즉, 무섭고 두렵더라도, 감정적으로 깊이 각인된 경험은 훨씬 더 오래 기억되고, 실제 위기 상황에서의 대처 능력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한편, 이 같은 몰입이 지나치게 강한 경우에는 심리적 스트레스가 훈련 효과를 방해할 수 있다는 우려도 존재한다.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경력이 있는 사람이나, 고위험군의 경우 가상재난 환경이 트라우마를 유발하거나 악화시킬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뮬레이션 설계 시에는 심리적 안전 장치사전 심리 평가, 사후 감정 정리(time-out) 등이 함께 마련되어야 한다.

실제 감정은 가상에서도 전이된다

재난 상황에서 사람들은 다양한 감정을 경험한다. 공포, 무력감, 분노, 책임감, 죄책감 등이 순차적으로 또는 동시에 나타날 수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가상재난 환경에서도 이러한 감정이 실제로 유사하게 발생한다는 연구 결과가 속속 보고되고 있다. 예컨대, 시뮬레이션 중 구조하지 못한 사람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거나, ‘내가 잘못 대처했다’며 자책하는 반응이 현실처럼 나타나는 것이다.

또한 가상공간에서 타인의 반응을 목격하거나, 동료 참가자의 불안을 감지할 경우, 감정이 공감적으로 전이(affective contagion)되는 현상도 관찰된다. 이는 현실 재난 시 나타나는 집단 정서 반응과 유사하며, 가상훈련이 심리적 모델링에 적절히 활용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재난심리학이 주목해야 할 새로운 실험실

가상재난 시뮬레이션은 단지 훈련이 아닌, 심리적 반응을 관찰하고 연구할 수 있는 새로운 실험실이다. 실험실에서 모든 변수를 통제하고 극한 재난을 재현하는 것은 윤리적으로도 물리적으로도 불가능하지만, 가상현실은 이 한계를 보완해준다. 실화재, 폭발, 붕괴 같은 재난을 반복적으로 시뮬레이션하면서 참가자의 감정, 생리 반응, 행동 패턴을 측정할 수 있으며, 이는 향후 심리적 회복탄력성 측정 및 향상 전략 개발에도 기여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이러한 시뮬레이션은 AI 기반 심리 분석과 결합되어 위험군 조기 발견, 감정 반응 예측 모델링, 인지적 대처 능력 측정 같은 정량적 데이터도 제공할 수 있다. 재난 대응 매뉴얼이 행동 중심에서 심리 대응 중심으로 전환되는 데 있어, 가상환경은 매우 강력한 도구가 될 수 있다.

감정의 리허설, 미래 재난의 준비

가상재난 시뮬레이션은 단순히 게임처럼 즐기는 경험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뇌와 마음이 재난에 어떻게 반응하고, 어떤 감정을 느끼며, 무엇을 학습하고 각인하는지를 미리 경험해보는 리허설이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자신이 재난 상황에서 느낄 공포, 책임감, 판단력 부족 등을 경험하고, 어떻게 대처할지를 사전에 고민하게 된다.

심리학자들은 이를 감정의 시뮬레이션(Emotional simulation)이라고 부른다. 미래에 닥칠지도 모를 위기를 대비하기 위해 지금 미리 감정을 연습하고, 대처 행동을 학습하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재난 대응력 향상이 아니라, 심리적 탄력성과 자기효능감을 높이는 중요한 방법이 된다.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재난 훈련의 시대

가상재난 시뮬레이션은 우리 사회가 이제 단순한 물리적 훈련을 넘어, 감정과 심리를 준비하는 단계로 진입했음을 보여준다. 앞으로 재난은 점점 더 예측 불가능하고 복합적이며, 빠른 판단과 감정 조절이 생존을 결정짓는 요소가 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가상재난 시뮬레이션은 단지 기술의 발전이 아니라, 인간 심리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미래형 재난 교육이라고 할 수 있다.

재난은 언젠가 올 것이다. 문제는 그 순간, 우리의 마음이 준비되어 있는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