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재난을 마주할 때마다 한 가지 공통된 심리적 반응을 보인다.
그것은 바로 ‘영웅’을 찾고, 기억하려는 경향이다.
뉴스 속 대형 화재, 지진, 참사, 팬데믹…
그 속에서 우리는 늘 어떤 한 사람을 기억한다. 모두가 혼란에 빠졌을 때 구조에 나선 소방관, 자신의 안위를 뒤로한 채 환자를 돌본 의료진, 익명의 기부자나 자원봉사자.
이들은 단순히 행동한 사람들 이상으로, 대중의 마음속에 “상징적인 존재”, 즉 영웅으로 자리 잡는다.
하지만 수많은 이들이 헌신하고 노력했음에도, 왜 특정한 인물만이 특별히 기억되는가?
이 글에서는 재난 이후 등장하는 영웅화 심리의 원인과 의미, 그리고 그 작동 방식에 대해 심리학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인간은 무력감 속에서 ‘의미’를 갈망한다
재난은 단순한 사고 이상의 심리적 충격을 준다.
삶의 일상성이 무너지고, 죽음과 상실이 가까워진다.
그런 순간, 인간은 무엇보다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를 원하게 된다.
통제할 수 없는 현실 속에서, 인간은 ‘왜 이런 일이 생겼는가’, ‘어떻게 이런 상황을 견뎌야 하는가’를 스스로 납득하고 싶어 한다.
이때 영웅 서사는 가장 효과적인 심리적 도구가 된다.
한 사람의 이타적인 행동, 자기 희생, 용기 있는 결단이 주는 메시지는 단순하면서도 강력하다.
"모든 것이 무너졌지만, 그래도 사람은 믿을 수 있다"는 희망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즉, 영웅의 존재는 재난의 혼돈을 심리적으로 정리해주고, 인간성에 대한 신뢰를 다시 일깨워주는 심리적 해석의 중심축이 된다.
행동보다 ‘이야기’가 기억된다
하지만 모든 구조자, 모든 봉사자가 똑같이 기억되지 않는다.
우리는 종종 ‘실제로 가장 많이 행동한 사람’보다, ‘극적인 이야기 속 인물’을 더 오래, 강하게 기억한다.
이것은 기억의 선택성과 관련이 있다.
사람은 수많은 정보 속에서 기억할 것을 고를 때, 감정적으로 강한 반응을 일으킨 이미지를 더 오래 간직한다.
예를 들어, 한 아이를 구하기 위해 불길 속으로 뛰어든 사람, 고립된 노인을 등에 업고 구조한 자원봉사자의 모습은 매우 상징적이고 감정적이다.
그들의 행동은 ‘숫자’로 환산할 수 없지만, 심리적 영향력은 매우 크다.
미디어도 이러한 감정적 상징을 강화하는 데 한몫한다.
사진 한 장, 영상 몇 초의 순간이 영웅 이미지를 강화하고, 이를 본 사람들의 심리 속에 '이 사람은 특별하다'는 내러티브가
자리잡게 된다.
이는 우리가 행동의 크기보다 상징성에 주목하는 심리적 경향을 반영한다.
영웅은 나의 ‘이상적 자아’를 투영한 존재
더 깊이 들어가면, 우리가 특정 영웅에게 감정적으로 끌리는 이유는 심리적 투사 때문이다.
투사(projection)란, 자신의 내면을 외부 대상에 반영하는 심리 기제이다.
예를 들어, 위험한 상황에서 침착하게 대응한 누군가를 보며 우리는 이렇게 생각한다.
“나도 저렇게 용기 있었으면 좋겠다.”
“내가 그 상황이라면 저런 행동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즉, 우리는 그 인물을 통해 자신이 되고 싶은 사람의 모습을 본다.
그 인물은 단순히 ‘좋은 사람’이 아니라, 우리 안의 이상적 자아를 대변한다.
특히 재난 이후처럼 불안정한 시기에는 사람들은 더욱 확실하고 선명한 가치의 상징을 원하게 된다.
그래서 영웅은 단지 구조자, 의료진의 모습에 그치지 않고 ‘정의’ ‘희망’ ‘용기’라는 감정의 집약체로 소비된다.
집단 회복을 이끄는 ‘영웅의 사회적 기능’
영웅화 심리는 개인의 감정 차원을 넘어서, 사회 전체의 회복 메커니즘으로 작동하기도 한다.
트라우마를 겪은 공동체는 고통의 원인을 해석하고, 재건의 동력을 찾아야 한다.
이때 특정 인물을 중심으로 서사가 만들어지면, 사회는 혼란을 하나의 ‘이야기’로 구조화할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은 다음과 같은 역할을 한다.
- 감정적 위안 제공: 누군가의 존재가 ‘세상은 아직 살만하다’는 희망을 제공함.
- 집단 정체성 회복: 같은 국가, 지역, 공동체의 사람이 영웅이 되었을 때 자긍심이 회복됨.
- 행동 기준 제시: 앞으로 유사한 상황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모범이 됨.
즉, 영웅은 단순히 ‘과거의 감동적인 인물’이 아니라, 미래의 행동 방향을 제시하는 사회적 이정표가 된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에게 영웅이 될 수 있다
재난은 인간에게 가장 큰 시험이 되는 순간이지만,
동시에 인간성의 가장 빛나는 면을 드러내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는 ‘누군가를 위해 행동한 사람’이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기억되는 사람이 되기보다는,
필요한 순간에 행동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영웅은 특별한 누군가만의 자격이 아니라,
용기와 책임감 있는 모든 사람 안에 숨어 있는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에게 영웅일 수 있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기억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순간에도 기꺼이 나설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
그것이 진정한 영웅의 의미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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